산이 있어야 산에 오르지
작성자
구현우 시인
작성시간
2019-03-25
작성시간
업데이트 : 2019-03-25
조회수
992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하나의 미리 정해 놓은 목적을 향하지 않는 단어가 단 하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 에드거 앨런 포


어린 시절 백일장에서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유롭게 쓰세요.” 아이들과 나는 공원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떠오르는 단어는 이런 것밖에 없었다. 구름… 나무… 밥… 더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놓인 상태였다. 자유롭게 쓰라는 얘기가 내게서 자유를 앗아가는 중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뭘 모르는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그날 나는 코앞에 보이던 나무와 나무 그늘에 대해 써서 냈다. 이후 선생님께서는 우리들 중에 절반이 넘게 나무를 가지고 글을 썼다고 했다. 다들 상상력이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심지어 상을 받은 아이도 나무였다.

<프리즌 브레이크>도 아닌데 왜 무형의 벽에 가로막혀 자유롭지 않을까? 함정은 의외로 믿었던 도끼에 있다. ‘자유롭게’란, 온갖 맛이 있는 사탕 가게가 아니라 밟아도 밟아도 모래뿐인 사막에 던져진 것과 같다. 차라리 ‘의자’를 주제로 쓰라고 말해 줬다면 철제의자 혹은 나무의자처럼 보다 구체적인 의자 생각이 났을 것이고 색이 바랜 교실 구석의 의자에 대해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막연함은 막연함을 낳는다. 길이 있어야 그 길 위를 바르게 걷든 뛰든 문워킹을 하든 드러눕든 이탈하든 할 것이 아닌가. 시야가 흐린 상황에선 더듬거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비틀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백지의 공포’라는 말을 들어 보았을 것이다. 뭘 쓰지? 어떻게 쓰지? 무슨 연유로 글을 쓰든 백지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당연히 어렵다. ‘쓰기’란 말은 말 자체가 너무도 거대해서 그 앞에서 자꾸만 망설이게 한다. 카프카, 톨스토이,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이스미스는 평생 무엇을 써야 한다는 고민이 끼어들 틈 없이 늘 아이디어가 샘솟았다고 하나 그것은 소재의 이야기지, 백지의 공포와 무관하다는 말로 들리지는 않는다.(그리고 천재는 아이디어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우리가 읽는 고전―작품이란 타고난 재능으로 쉽게 해낸 흔적이 아니라 매번 찾아오는 불안과 공포를 정면으로 돌파해 낸 기록이다.

쓰기 시작한 이상 잘 쓰고 싶은 건 당연하다. 그런데 잘 쓴다는 건 뭘까? 객관적으로 ‘웰메이드’인 작품도 있겠으나 명작이란 평가와 상관없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좋거나 나쁜 작품도 있다. 그렇다면 ‘좋은 글’은 잠시 미뤄 두고 얘기해 보자.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는 글은 그냥 읽기도 힘들다. 읽는 데에도 목적이 있으니―서점에서 “패션”의 정보를 찾고 있다면 “패션/잡지” 코너를 향해 가게 되듯―쓰는 데에도 목적이 필요하다.

이때 이정표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이 육하원칙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얘기를 제일 잘한다. 그러니 처음에는, ‘나’로 시작해 보자. 다음은 대상이다. ‘너’에 대해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 지나가다 본 갖고 싶은 ‘모자’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여기까지만 해도 벌써 글쓰기라는 트랙 위에서 운동화 끈을 조인 정도가 되었다. ‘누가’와 ‘무엇’만으로도 이야기는 제법 분명해졌다. 이를테면 “‘나’(누가)는 ‘모자’(무엇)를 ‘저번 주 월요일’(언제) ‘홍대 골목 구제샵’(어디서)에서 ‘우연히 보았고’(어떻게) ‘탐이 나서’(왜) 여태 눈앞에 아른거린다.”는 육하원칙의 문장이 이미 ‘나’에게 와 있다. 일단 내가 출발하면 된다. 모로 가든 간다. ‘나’는 모자 하나에 대해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도 있고, 구제샵 공간 속의 모자를 보여 줄 수도 있고, 모자가 없는 ‘나’를 그려냄으로써 모자가 필요한 ‘나’를 역설할 수도 있다. 긍정하거나 부정하거나 어느 쪽이든 확실한 대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엇인지 자기만큼은 알아야 말할 수 있다. 안개 속에서는 이거든 저거든 다 그게 그거 같지 않은가.


정확한 ‘글쓰기’의 실험

상상력은 제한해야 한다. 모순적인 문장으로 보이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바꿔 보자. 상상력은 제한된 상황에서 더 커진다. ‘의자’라는 단어를 둔다면, 의자 안으로 파고들든 의자를 완전히 벗어나든 ‘의자’가 놓인 자리에서부터 상상력은 튀기 시작한다. 제멋대로 붓을 휘갈기는 것도 도화지와 물감이 있어야 한다. 모호하게 쓰기 시작하는 일은 요리사가 불과 칼 없이 요리를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도구가 없으면, 자연주의 식단이 아니라 그냥 야생이다.) 잘 쓰기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건 정확하게 쓰기이다. 음식점에서 아무거나 달라고 하면 아무것도 안 되지 않는가. 분명한 하나를 쓰기 시작해야 백지의 공포를 견뎌낼 힘이 생긴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으면 아메리카노를 주문해야 아메리카노가 나온다. 정확하게. 적확하게.



구현우 시인 | stoyer@naver.com

눈 뜨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숨 쉬는 마음으로 음악을 한다. 

듣거나 보거나 쓰거나 말하거나 하면서, 겨우 한 사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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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체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