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작성자
구현우 시인
작성시간
2019-08-14
작성시간
업데이트 : 2019-08-14
조회수
111

출처: 클립아트코리아


밀물과 썰물

서해에 있는 섬에 놀러 갔다. 가까워서 부담이 없었다. 바닷물이 해안을 넘실대고 있었다. 다시 ‘중2병’이 도졌나. 물이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울렁이는 기분이었다. 여름인데도 우리가 간 곳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전세 낸 거 같고 좋네. 섬이 고향인 친구가 말했다. 우리 이제 뭐 할까. 바다 들어갈래? 친구는 싫다고 말했다. 옷이 젖잖아. 나는 의아했다. 그러려고 온 거 아냐? 응 그냥 바닷바람이나 쐬자는 거였지. 나는 친구 옆에 보노보노처럼 쭈그려 앉았다.


저녁이 되자 조금 신이 났다. 새우와 조개와 고기를 잔뜩 구워 먹었다. 먹을 것도 배부르게 먹고 나니 더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바다에 갔다. 어, 저기 우리가 앉아 있던 곳인데. 모래사장이던 곳까지 물이 한껏 들어와서 출렁였다. 아침이면 또 빠져. 친구가 덤덤하게 말했다. 나도 나지만, 얘는 중2병이 언제 낫는 거지? 아니면 달관한 건가. 나는 친구를 이상하다는 듯 흘기고 깜깜한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분명 당연한 일인데 눈으로 계속 물결을 좇고 있자니 뭔가 신기했다. 물이 통째로 하나의 생물처럼 느껴졌다. 모래를 덮고. 모래를 감싸고. 모래를 풀고. 물은 물을 넘고 물이 물을 덜어내고 있었다.


“시는 쓰기보다는 지우는 장르인 것 같아요. 아니, 쓰고 지우는 장르.”


한 시인과 시를 쓰는 일에 대해 대화한 게 생각났다. 왠지 밀물과 썰물이 바로, 시를 그렇게 쓰고 지우는 느낌과 닮은 기분이었다.


할 말이 많아도 하지 않으면 언제 하나요

'할많하않'. 별걸 다 줄이는 시대에 나온 신조어 중에 하나다. 재미있는 말이다. 말해서 뭐해, 같기도 하고 말할 가치가 없다, 같기도 하고. 입으로 말할 때는 참 쓸모 있는 말 같다. 침묵이 금이라고도 하니까. 하지만 글을 쓸 때는 반대다. 할 말이 많으면 일단 하고 봐야 한다. 이유는 별게 아니다. 할 말을 지금 하지 않으면 까먹기 때문이다. 좋은 문장과 나쁜 문장을 짐짓 구분하고 머릿속에서 검열을 다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밀물과 썰물을 언급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당신의 생각, 당신의 말을 밀물처럼 마구 백지 위에 쏟아내는 게 먼저다. 이건 별론데. 이 문장은 좀 기시감이 드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머리만 복잡해지고 당신은 하얀 바탕 위에서 커서가 깜빡이는 모습만 짧게는 몇십 분, 길게는 몇 시간 동안 보게 될 것이다. 일단 뱉어내야 한다. 스스로 턱도 없는 이야기, 글로 써봐야 남을 것도 없는 일기도 못 될 부스러기 같은 거라고 보지도 말자. 그런 판단은 나중 문제다. 한 문장을 겨우 써 놓고 팔짱을 낀 채 한참 고민한다고 명문이 나오지도 않는다. 일단 길게 쓰자. 분량이 길어진다고 걱정하지도 말기를 바란다. 나오다 나오다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쓴 다음에, 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글 문서에서 가장 많이 쓰게 되는 단축키 중 하나는 Ctrl + Z (실행 취소/뒤로 가기)다. 아마 문학이 아니더라도 창작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단축키를 자주 활용할 것이다. 단축키로 손쉽게 되돌릴 수 있으니 뺀 것을 아까워할 필요도 없다. 마음껏 쓰고, 마음껏 지우면 된다.


그렇게 쓰고 지우고, 결과적으로 별로 남는 게 없더라도, 혹은 완전히 백지로 돌아가더라도, 아예 없던 것과는 분명 다르다. 당신 안에는 당신이 무엇을 썼다는 기록이 오래 남게 될 것이다.



구현우 시인 | stoyer@naver.com

눈 뜨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숨 쉬는 마음으로 음악을 한다. 

듣거나 보거나 쓰거나 말하거나 하면서, 겨우 한 사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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