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이가 VR 체험을 하고 있다.
16일 오후 2시쯤 점심밥을 해치우고 삼성 코엑스에서 열린 ‘제 17회 대한민국 교육박람회’ 행사장을 찾았다. 박람회 명찰을 목에 건 한 무리의 학생들을 따라 행사장 입구에 도착했다. 제대로 보려면 2박 3일이 걸린다는 루브르 박물관처럼, 행사 규모는 방대했다. 참여 기업만 300개, 부스는 1,200개에 달했다. 일정에 쫒기는 관광객이 모나리자와 다빈치 동상만 보고 빠지는 것처럼,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조기 초등교육 특별관’, ‘평생 직업교육 특별관’을 다 거르고 ‘에듀테크 특별관’으로 직행했다. 멀리서부터 알록달록한 GOOGLE 문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부스에 도착할 때쯤 뭔가 낌새가 이상했는데,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전 예약한 인원 외에는 들어갈 수가 없단다. 처음부터 김이 샜다. 부스 직원은 하루에 100명, 3일간 딱 300명만 모아 놓고 구글 클래스룸 집체교육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나이트클럽 문지기처럼 서 있는 진행요원의 눈을 피해 들어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3미터 높이의 펜스가 앞길을 가로막았다. 아쉬운 대로 책자만 챙겼다.
바로 옆 애플 부스는 활짝 열려 있다. 원래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하는 구글 안드로이드와 달리 애플 iOS는 폐쇄형 생태계를 지향한다. 다른 운영체계, 기기와 호환이 잘 안 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날 행사장에서만큼은 애플과 구글이 뒤바뀌었다. 부스 직원의 설명도 흥미로웠다. “구글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과 (애플 태블릿의) 호환이 가능합니다. 이걸로도 다 쓸 수 있어요”라고 귀띔했다. 구글의 뒤를 따라잡으려는 노력일까. 국내는 물론이고 에듀테크 선진국인 미국에서도 애플은 구글보다 한 걸음 아니, 수십 걸음 뒤처져 있다. 시장조사업체 퓨처소스 컨설팅에 따르면, 지난 2018년 구글 교육용 태블릿인 크롬북은 미국 초등학교 교육 기기의 60%를 장악했다. 애플은 18%다.
조용했던 애플 부스와 달리 EBS 쪽은 관람객들로 북적댔다. 2020년 펭수 달력을 받으려는 인파였다. 그냥 주는 건 아니었고, ‘EBS 영어 레벨테스트’를 거쳐야 했다. 20년간 죽어 있던 EBS 계정을 살려 로그인까지 하는 수고를 모두 감수했다. 그만큼 펭수 달력이 탐이 났다. 레벨테스트 코너를 클릭하니, 왕초보부터 전문가까지 7가지 레벨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내 영어 실력을 잘 몰라 테스트하는 건데, 자신의 영어 수준을 고르라고 하니 좀 이상했다. 2번째 레벨인 ‘매우 기초적인 영어단어를 이해할 수 있어요’를 선택하고 30개 문제를 순식간에 풀었다. 결과 분석과 함께 맞춤형 추천 강의가 떴다. 개인 실력 진단에 따른 동영상 강의. 요즘 EBS가 표방하는 ‘자기주도학습’을 염두에 둔 연계 커리큘럼인 듯했다.
EBS에 이어 영어실력 자가진단을 한 번 더했다. 배너에 ‘인공지능(AI) 영어 실력 자가진단’이라고 큼직하게 써놓은 부스로 들어가 체험 신청을 했다. 직원은 태블릿을 건네며 어휘, 듣기, 쓰기, 말하기 순으로 문제가 나간다고 설명해 줬다. 이 테스트는 영어 실력을 물었던 EBS와 달리 원점에서 시작했다. 다짜고짜 문제가 나왔다. 첫 문제는 쉬웠다. ‘is’의 뜻을 고르라고 해서 ‘~이다’를 답으로 골랐다. 초등 수준의 단어 서너 개가 더 나와 너무 쉽다고 생각할 때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단어가 나왔다. 말하기와 듣기도 처음에만 쉬웠고 중반부턴 손도 못 댔다. 사용자가 문제를 곧잘 풀면 AI가 거기에 맞춰 난이도를 높이는 듯했다. 말하기 평가까지 완료하니 분석 결과가 나왔다. 5등급에 토익예상점수 550점이었다. 결코 좋은 성적이라 할 수 없는데도, 직원은 “이 정도면 상위 수준”이라며 축하해 줬다.
다른 AI영어 부스에 들렀다. 영어로 말을 걸면 바로바로 대꾸해 주는 AI 회화 로봇이 있었다. 사실 큰 기대는 안 했다. AI스피커에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올레TV 계약을 갱신할 때 무료로 기가지니 AI스피커를 받았는데, 이 녀석은 “좀 더 열심히 할게요”란 말만 되풀이할 뿐 기본적인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말할 때마다 ‘지니야’를 불러야 하는 것도 귀찮았다. 이 AI영어는 이런 불편함이 없었다. 호출어 없이 그냥 영어로 말을 하면 척척 답변을 내놨다. “Who are you?”라며 먼저 말까지 걸어 줬다. 고마운 마음에 “Thank you!”(고마워)라고 말하니 AI는 “Not at all”(별거 아냐)이라고 화답했다.
AI 가상현실(VR) 체험장도 많은 이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약 20분을 기다린 끝에 5명의 아이들과 6인승 VR 체험기에 탑승했다. VR기기를 착용하니, 직원이 어눌한 한국어로 “잘 보여요?”라고 물었다. 명찰을 보니 일본 이름이 적혀 있었다. VR 콘텐츠는 독도 전경. 일본인의 안내로 ‘대한민국 땅 독도’를 VR로 체험하니 뭔가 뿌듯했다. 다만 멀미는 어쩔 수 없었다. 장면 변환에 따라 의자가 함께 움직여 인지부조화가 좀 덜했지만, 멀미가 점점 심해져 마지막 20초 동안 눈을 감고 쉬었다. “벌써 끝났다”며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보니 VR에도 세대 차가 존재하나 싶다.
평일인데도 행사장엔 사람이 많았다. 다들 명찰을 목에 걸고 있어 신원 파악이 가능했는데, 특히 교사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전라도에서 온 중학교 교사, 모 학습지 방문교사, 영어 방과 후 교사까지 다양했다. 이들은 이번 박람회에서 어떤 걸 얻었을까.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술을 지렛대 삼아 아이들을 직접 지도할 교사들이 미래 교육의 희망이 아닐까 싶다.
윤석진 기자 | drumboy2001@mtn.co.kr
머니투데이방송 교육산업 담당. 기술 혁신이 만드는 교육 현장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쉬운 언어로 에듀테크 사업 동향을 가감 없이 전달합니다.
한 아이가 AR 체험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