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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정보

봄에 나는 설레지 않아요

사진=노래 <봄 사랑 벚꽃 말고> M/V 캡처


싫어도 싫지 않은 척

나는 겁이 많은 아이였다. 공포영화를 못 보는 건 물론이고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다리가 풀려 버리기 일쑤였다. 정말이지 나는 여러 면에서 겁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남들 같지 않을 때를 극도로 무서워했다. 반 아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김치를 못 먹는 것. 혼자만 성이 구 씨인 것. 슬픈 다큐멘터리를 보고 모두 울 때 나만 울지 않는 것. 그런 것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나의 어딘가가 잘못된 게 아닐까 싶었다. 모두가 웃으니까 웃고, 바라지 않음에도 몇몇 모임에 어울렸다. 유별난 아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한편인 척을 해야 했다.

흔하디흔하게 말하듯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사실 더 나아가서는 틀려도 괜찮다. 죄인이라도 된 듯이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 고백하자면 내가 작가가 될 수 있던 계기는 다르고 틀리고 실패한 경험에서부터였다.

요컨대 보편적으로,

봄에 찾아오는 사랑과 설렘이 있고, 여름은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를 찾게 하고,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고, 겨울은 눈과 고독과 크리스마스가 있겠지만

나는,

봄에 별로 설레지 않고, 여름의 바다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가을이라고 책을 더 좋아하진 않고, 겨울에 찾아오는 함박눈과 추위를 외로움과 연결해 감성에 크게 젖는 편이 아니다.


당신은 어떤가?


전국에 비, 이곳은 맑음 때때로 흐림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요소 가운데 날씨만큼이나 생활과 기분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드물다. 기후에 둔감한 이라도 옷장과 신발장 앞에서는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서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예감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보편적인 감수성 안에는 개별적인 감정도 있다. 이를테면 나는 비를 좋아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이게 무엇이냐면, 비가 내릴 때 나는 소리, 냄새, 어쩐지 환기되는 그 느낌은 좋아하는데 빗속으로 들어가 우산을 쓰고, 신발과 바지 밑단이 젖는 상황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다. 분명히 비를 좋아한다고도 또는 싫어한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오묘함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은가. 기분이란 건 흑과 백 또는 yes or no로 단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누구든 취향이 있고, 취향은 역시 존중받아야 하는 법! 나는 그런 사사로운 감각으로 “창밖의 비를 좋아하지만 / 비에 젖는 건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 너”로 시작하는 시를 쓴 적이 있다. 발표한 지 조금 지나고 어느 자리에서 그 시를 읽었다는 분을 만났다. 자신도 비에 대한 감정이 그러하다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테라스에서 비를 보다 물이 튀면 불쾌해하는 그런 정황에 대해 말을 나누고 웃고 맞장구칠 수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면서. 그게 좋았다.

비를 통한 위의 예시는 조금 일반적이기는 하다. 그저 처음부터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어떤 날 대다수가 비를 보고 슬프다고 느낀다 한들 내가 그렇지 않다면 그게 비에 대한 감정이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비가 내려서 슬프다’는 문장을 꺼내지 못한다. 솔직해도 된다. 아니 솔직해야 한다. 물론 내가 절대다수에 포함되어 비를 보고 슬프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생길 수밖에 없는 의문 하나.


“그들이 느끼는 비에 대한 슬픔과 내가 겪고 있는 비에 대한 슬픔의 정도와 종류가 같을까?”


비슷할 수는 있어도 아주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잘못된 것도 당신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나’는 모두 자신이 ‘틀린’ 것 같다는 의심 속에 있다. 보편적이라는 말에 삼켜져 남들은 괜찮아 보일 뿐이다.


여전히 나는 김치를 못 먹고 신파극 앞에서 울지 않는다. 이것은 고칠 수 있는 문제인가? 고칠 수도 없고 문제도 아니다. 〈봄 사랑 벚꽃 말고〉라는 노래처럼. 봄인데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다 다른 이야기를 갖고 있다. 그림일기처럼 날짜와 날씨와 순간의 기분으로 첫 문장을 써 보자. 어제와 오늘의 기온이 같아도 창밖의 풍경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니 내가 ‘나’로 살아가는 한 일상의 같은 내용도 매번 다른 이야기로 적히게 될 것이다.



구현우 시인 | stoyer@naver.com

눈 뜨는 기분으로 시를 쓴다. 숨 쉬는 마음으로 음악을 한다. 

듣거나 보거나 쓰거나 말하거나 하면서, 겨우 한 사람이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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