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칸, ‘대안학교’ 칸랩스쿨 운영해 보니
- 작성자
- 윤석진 기자
- 작성시간
- 2020-01-08
점심시간, 웬 성인 남성이 교실로 들어와 도시락을 먹고 있는 학생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 “인공지능(AI)은 무엇일까? AI가 인간처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까?” 아테네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던 소크라테스처럼 이 남자는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AI가 사람이 시키는 대로 작동한다는 보장이 있을까? AI도 사람처럼 고집을 부리거나 편견을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쉽지 않은 질문임에도 대답하는 학생이 있다. “우리가 고집과 편견을 모두 버린다면 가능할 거 같아요”라고.
대강 눈치 챘겠지만 이 학교는 일반적인 학교가 아니다. 소통 지향형 교육을 추구하는 ‘칸랩스쿨’(Khan lab school)이다. 그리고 질문을 던진 남자는 이 학교의 창립자인 살만 칸이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를 졸업하고 헤지펀드 애널리스트로 일하던 금융맨인데, 조카 나디아의 공부를 돕기 위해 유튜브에 수학 풀이 영상을 하나둘씩 올리면서 교육자로 전향했다. 2008년 비영리 온라인 교육채널 칸 아카데미를 개설하더니, 2014년엔 아예 ‘대안학교’ 칸랩스쿨을 차렸다. 조카를 통해 현행 교육체계의 문제점을 깨닫고, 미래시대에 맞는 새로운 교육을 선보였다. 학생 중심의 맞춤형 학습을 통해 미래시대의 필수 역량인 창의성과 의사소통 능력, 문제해결 능력 등을 길러 주자는 것이다. 이 학교는 개교한 후 꾸준히 입학생 수가 늘어 2016년 65명에서 작년 7월 기준으로 200명을 넘어섰다. 어엿한 학교 규모로 성장한 것이다.
살만 칸이 제시한 미래학교와 기존 학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학습 진도’다. 이 학교엔 학년이 없다. 6학년이어도 실력이 부족하면 5학년 내용을 배우고 반대로 잘하면 상급 단계 진도를 나간다. 학교는 유치원생부터 중학생까지(5~12학년)까지 받지만, 나이별로 반 배정을 하지 않는다. 학습 이해도와 관심사에 따라 나뉘기 때문에 10살 형과 8살 동생이 사칙연산을 함께 공부하는 보기 드문 광경이 펼쳐진다. 나이를 넘어선 개인 맞춤형 교육이 이뤄지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살만 칸은 “같은 나이여도 개인별로 이해도가 다르다. 누구는 70점, 누구는 95점을 맞는데 똑같이 진도를 나간다면 학생 간 실력 격차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강의식 수업도 찾아보기 어렵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헬퍼(조력자)에 가깝다. 학생이 자신의 흥미와 수준에 맞춰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학생 스스로 시간표를 짜고 학습 목표까지 설정한다. 공간 구성도 일반 학교와 다르다. 칸‘랩’스쿨이란 이름답게 실험실을 연상케 하는 열린 학습 공간이 곳곳에 배치돼 있다. 학습 내용별로, 창작물을 만들려는 아이는 Make Lab(공작실), 브레인스토밍이 필요한 아이는 Ideate Lab(사색실), 학우와 토론을 벌이려는 아이는 Chat Lab(대화실)으로 들어간다. MIT 출신이 만든 학교답게 디지털 기술을 접목하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학생들은 아이패드, 크롬북으로 책을 보고 롤러블(돌돌 말리는) 디스플레이로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디지털 기기로 공부한 덕분에 학생의 학습 기록은 데이터로 축적되고, 이는 AI 맞춤형 학습의 재료로 쓰인다.
살만 칸이 대안학교를 차렸다고 해서 전통학교와 완전 결별했다거나 교사의 역할을 축소시켰다는 지적이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스스로 고집과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한 덕분인지, 그는 최근 들어 전통 학교의 강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올해 1월 1일 ‘EdSurge News’에 직접 기고한 글 “Three Things We Learned at Khan Academy Over the Last Decade”에서 “지난 10년간 대안학교 운동을 진행한 결과 3가지를 느꼈다. 교사가 학교의 중심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매일 지속해서 그들에게 배워야 한다”라고 말했다. 또 “우리의 공립학교는 많은 도전에도 불구하고 지속해서 진전을 이루고 있다”며 전통학교를 추켜세우기도 했다.
살만 칸은 공립학교와의 연계도 구상 중이다. 칸랩스쿨 운영을 통해 얻은 노하우를 일반 학교에 이식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가령, 그는 “일주일 중 적어도 한 차례 개인 맞춤 수업을 하면 큰 학습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체 커리큘럼의 80%는 전통방식으로 하고 나머지 20%만 ‘칸랩스쿨식’ 학생 맞춤형 학습을 집어넣는 것이다.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해 중순쯤 미국 수능 격인 SAT 시험에 대비하는 데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개인 맞춤형 시험 대비 회사인 NWEA와 협력키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점진적 개선이 아닌 교육 혁신을 부르짖었던 살만 칸인 만큼, 전통학교의 강점을 언급한 것이 매우 낯설게 다가온다. 획일화된 시험을 거부했던 그이기에 SAT 준비 과정을 개설한 조치도 의외다. 교사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대표적인 인물이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도 그렇다. 이를 두고 살만 칸의 ‘교육 실험’이 후퇴했다고 지적할 수 있지만, 현실을 고려한 조치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듯하다. 빠듯한 학교 예산으로 칸랩스쿨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칸랩스쿨의 1년 등록금은 2만5000달러(2900만 원)이고 교사당 총 학생 수는 15명이다. 이런 시스템은 적은 예산으로 교사당 수백 명의 학생을 상대해야 하는 전통학교 입장에선 어렵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다양한 변화를 꾀하고 있는 살만 칸의 행보는 우리나라 대안교육에도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윤석진 기자 | drumboy2001@mtn.co.kr
머니투데이방송 교육산업 담당. 기술 혁신이 만드는 교육 현장의 변화를 관찰합니다. 쉬운 언어로 에듀테크 사업 동향을 가감 없이 전달합니다.